0202

기사

잡스도 집에선 LP로 감상…MP3 위주 음악 소비 균열중

2014.12.5
0202
지난달 29일 새벽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엘피(LP) 바 ‘게스후’에 모인 사람들이 노래를 즐기며 한 벽을 가득 메운 앨범들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디지털] 디지털 음악 향유의 변화

밤이 깊도록 음악에 취한 이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11월29일 새벽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바 ‘게스후’에선 밴드 들국화가 1987년 발표한 ‘사랑한 후에’부터 팝가수 비욘세의 ‘헤일로’(halo)까지 다양한 노래들이 쉼없이 흘러나왔다. 흥에 겨운 한 여성은 일어나 춤을 췄다. 이 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한 면을 천장까지 가득 채운 10만장의 엘피(LP) 음반들이다. 김형신(44) 대표가 지난 18년간 중고 엘피 매장을 운영하며 쌓은 앨범들이다.

스마트폰에 엠피3(MP3) 파일을 수천 곡씩 담아 언제 어디서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게 디지털 시대 음악 향유의 표준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최근 변화 조짐이 일고 있다.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으며 밀려난 엘피 레코드와 턴테이블이 점차 마니아 층을 늘려 가는 게 대표적이다. 교보문고 핫트랙스는 올해 1분기 전국 매장의 엘피 판매액이 지난해 동기에 비해 200%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늦은 밤, 바에서 커피를 두고 마주 앉은 김형신 대표는 “30~50대 중장년층이 주고객이지만, 엘피를 몰랐던 20대들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전축은 1970~80년대 텔레비전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지만 지금은 추억의 물건에 가깝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달 턴테이블이 세계적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다면서, 미국의 올해 수입량이 전년보다 5% 늘어난 8만4000개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엠피3 일변도의 디지털 음악 생태계 안에서도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고음질 오디오 파일과 재생기(플레이어)의 부상이다. 한때 대한민국 벤처 신화를 썼던 아이리버는 이 분야를 선점하면서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핫트랙스 엘피 판매 1년새 2배로
아이리버, 아스텔앤컨으로 새 도약 모색

“최근 엘피 선호는 복고 문화와 달라
예술감상이란 음악 본질에 접근 시도”

시디(CD)의 노래를 추출한 음악 파일은 보통 확장자 이름과 같이 웨이브(wav) 파일이라고 부른다. 이 파일들은 시디와 같은 음질을 지니지만 크기가 한 곡에 수백 메가바이트(MB)에 달할 정도로 크다. 엠피3는 여기서 사람의 가청 범위 밖의 데이터들을 잘라내고 나머지를 압축해 만들어지는데, 한 곡당 3~4메가바이트에 불과할 정도로 작지만 내용의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고음질 오디오 파일은 이런 손실을 없애고 시디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면서 압축한 파일을 말한다. 플랙(FLAC) 파일이 대표적인데 용량이 30~40메가바이트에 이른다. 무손실 압축음원이라고도 불린다.

아이리버는 2012년 무손실 음원 전용 플레이어인 ‘아스텔앤컨’을 출시하며, 2000년대 초반 세계를 휩쓸었던 엠피3 플레이어 선두로서의 명성을 되찾으려 노력중이다. 이에 힘입어 이 회사 오디오 플레이어 제품군의 매출은 2012년 146억원, 2013년 153억원으로 늘어난 데 이어, 올해는 상반기에만 이미 10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아스텔앤컨은 고급형이 278만원에 이르고, 곡도 한 곡당 1000~2000원은 한다.

 

0101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쿠르베’ 청음실에서 박성제 피에스제이(PSJ)디자인 대표가 턴테이블에 엘피를 올려놓고 있다.

외국에선 엠피3가 지배하는 디지털 음악 체제에 대한 반항의 기운이 진작부터 높았다. 세계적 싱어송라이터인 닐 영은 선봉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2012년 <와이어드>와 한 인터뷰에서 “내 목표는 지난 50년 동안 악화된 예술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디지털은 우리 음악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압축된 파일과 스트리밍으로 쉽게 음악을 즐기는 대신, 질 나쁜 소리만 듣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의 일화를 소개했다. “잡스는 디지털 선구자였지만, 집에 돌아가면 엘피판으로 노래를 들었다”는 것이다. ‘아이팟’으로 아이리버를 누르고 엠피3 플레이어 시장을 재편하고, ‘아이튠스’로 음반업계와 피투피(P2P) 서비스 사이의 오랜 음원 분쟁을 종식시킨 당사자가 정작 일상에서는 디지털 파일을 멀리한 아날로그 음악 애호가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하지만 음악 향유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구분은 애초 의미가 없는 일인지 모른다. 피에스제이(PSJ)디자인의 박성제(47) 대표는 “듣는다는 것은 늘 아날로그였다”고 말한다. <문화방송> 해직기자로, 지금은 ‘쿠르베’라는 수제 스피커 제작자인 그는 오랜 오디오 애호가이기도 하다. “소리와 우리 귀는 아날로그입니다. 이는 불변이죠. 처음 소리를 녹음하는 과정과, 저장한 녹음을 다시 소리로 바꾸는 과정은 반드시 아날로그적인 것이죠.” 중간의 저장 장치가 비닐로 만든 엘피판이거나 디지털인 하드드라이브일 수 있고 파일을 인터넷으로 내려받거나 테이프로 복사할 순 있지만, 결국 우리 귀로 들어올 때 종착점은 공기를 울리는 아날로그 음파라는 것이다.

근래의 엘피 선호 이유에 대한 김형신 대표의 관점도 비슷하다. 김 대표는 “음악은 과거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예전 노래들을 찾아 듣게 됩니다. 그럼 당시 노래를 가장 잘 듣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엘피건 시디건 그 노래가 처음 발매되던 때의 매체를 그대로 재생하는 것 이상은 있을 수 없죠.” 더 좋은 노래를 듣고자 한다면 당시로 시간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물론 음악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단지 기호가 세분화되는 것일 수도 있다. 더 좋은 품질, 차별화된 제품을 소비하려는 대중의 욕구와 기업의 마케팅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박성제 대표는 “하지만 엘피 등에 대한 지금의 대중적 관심은 단순한 복고 문화와는 다르다고 본다. 예술을 감상한다는 본질적인 요소에 더 다가가고자 하는 관심이 높아져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