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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리포트

새로운 삶의 불가능성

2014.09.19

새로운 삶의 불가능성 연결이 기본값인 디지털 세계의 덫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신분을 바꿔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에는 성당 주교관의 은그릇을 훔친 혐의로 붙잡힌 장발장이 “내가 준 은촛대는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라는 미리엘 주교의 감화를 계기로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죄와 잇단 탈옥 시도로 인해 19년간의 옥살이를 끝내고 세상으로 나오지만 전과자 장발장은 식사도, 잠자리도 구할 수가 없었다. 장발장은 ‘마들렌(Madeleine)’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바꾼 뒤 기업가로 성공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죽을 뻔한 시민들을 여러 차례 구조하며 시민들을 감동시켜 시장에 천거된다. 장발장이 전과자라는 낙인을 벗고 과거와 단절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장발장의 신분 세탁을 집요하게 추적한 자베르 경감은 전과자가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경찰의 숭고한 의무라고 믿는다.

사회적 망각의 보장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제정되어 근대 사법제도의 기틀을 다진 프랑스 형법은 ‘형의 실효’ 제도를 도입했다. 형이 집행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형벌의 소멸과 복권을 규정해 전과자로 겪어야 할 각종 제약이나 불이익을 없애주고 정상적인 사회 복귀를 지원함으로써 사회의 안전도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죄에 대한 대가로 형벌을 받고 갱생의 삶을 살고 있는 ‘장발장’에게 평생 전과자라는 낙인찍힌 신분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담긴 제도다. 우리나라도 ‘형의 실효에 관한 법률’을 두고 있다. 전과자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전과 기록이 삭제된다. 무기징역도 형벌을 이수한 지 10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형의 실효가 이뤄지게 되어 있다. 전과자가 한 번의 전과 기록으로 인해 영원한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지속적으로 사회적 차별을 받는 것을 막고 사회 복귀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다.

한때의 실수로 사람을 영원히 낙인찍지 말고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형의실효’의 취지다.

한때의 실수로 사람을 영원히 낙인찍지 말고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정신이 가장 잘 반영된 영역은 청소년의 비행에 관한 법률이다. 성장 단계에 있는 청소년의 비행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나 엄중한 처벌 대신 교육과 선도를 통해 관용을 제공한다. 민주주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만인에게 재판 절차를 개방하는 재판 공개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청소년 범죄에 대한 재판은 예외다. 비공개로 이뤄지고 언론 보도는 엄격하게 통제된다. 청소년 범죄를 다루는 소년법은 범죄 기록의 열람과 유통에 대해서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소년부 판사의 허가가 있어야만 열람할 수 있고 청소년이 형을 마친 이후에는 아예 형 자체를 선고받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 성년 이후의 삶을 보호하고자 한다. 청소년이 성인이 된 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보장하는 것이 사회적 안정성과 교정 측면에서 효과가 높다는 고려가 바탕에 깔려 있다.

불명예스러운 과거와의 의도적 단절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법률적 장치는 또 있다. 파산과 신용정보에 관한 법률이다. 신용정보법은 파산, 연체, 부도, 체납 정보 등을 사유가 사라진 뒤 5년 안에 삭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유효기간이 지난 개인의 과거 신용정보와 기록을 근거로 차별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파산한 사람도 새 출발이 가능하도록, 사회적 망각을 적용하는 제도다.

범죄자나 파산한 사람만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새 출발을 위해서 과거와의 결별이 필요한 영역은 그밖에도 많다. 불가에서는 출가자에게 속세에서의 일을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구도의 삶을 수행하려면 속세에서의 과거를 끊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과거와 결별이 필요한 사람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불행하고 아픈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사회 전체를 놀라게 한 대형 사건의 피해자가 사건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람들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잊고 싶은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있다.

지금도 검색되는 1979년의 ‘정효주 양 유괴 사건’ 기사. <동아일보 1979. 4. 14일자>

1979년 4월 14일 ‘정효주 양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부산시 남성초등학교 4학년이던 정효주 양은 아침 등굣길에 승용차를 이용한 유괴범에 의해 납치됐다. 납치범은 효주 양의 부모에게 딸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고 1억 5000만 원을 요구했다. 신문과 방송이 이 소식으로 뒤덮이고 납치 닷새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무사히 효주 양을 돌려보내면 관용을 베풀 것”이라는 대통령 긴급 담화까지 발표했다. 정효주 학생은 1년 전인 197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괴 사건의 피해자였다. 하굣길에 유괴범에 납치돼 33일간 끌려다니다가 천신만고 끝에 부모 품으로 돌아온 지 178일 만에 또 다른 납치범에게 두 번째로 납치된 것이다. 1차 구출 뒤에 대대적인 언론 보도를 통해 효주 양이 부산의 부유한 기업가 외동딸이라는 신상정보와 함께 사진까지 널리 알려졌다. 이 때문에 효주 양은 2차 범행의 표적이 되었다. 2차 납치에서 다시 극적으로 생환한 효주 양은 이후 과거의 악연과 단절을 시도했다. 사람들의 관심과 언론의 노출을 피하기 위해 아예 이름을 바꾼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사람에게 이름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해주는 가장 중요한 식별 수단이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개명을 신청하고 있다. 법원은 과거에는 사회적 혼란을 이유로 개명 신청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왔지만 최근에는 개인의 행복추구권 차원에서 폭넓은 개명 사유를 인정하는 추세다. 개명 신청은 2000년 3만 3210건이던 것이 2010년에는 16만 5924건으로, 다섯 배 넘게 늘어났다. 부정적인 어감, 놀림감, 범죄자와 동명 등 개명 신청 사유는 다양하지만 상당수는 자신의 이름에 붙어 있는 과거와 결별하고 새 인생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름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신원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사람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제도도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미국 법무부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마약 밀매나 조직범죄 등 강력 사건의 증인이나 피해자가 수사 협조나 재판과 관련해 보복 범죄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잇따르자 미국 정부가 1982년 입법한 ‘피해자 및 증인보호법(The Victim and Witness Protection Act)’에 따른 제도다. 보복의 위험에 노출된 증인이나 범죄 신고자에게 주거지 이전과 직업 알선은 물론, 성형수술과 신분 세탁을 지원한다.

한국 정부도 범죄 피해자나 고발자 보호를 위해 미국과 유사한 피해자․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제대로 실행되고 있지 않다.

과거와의 결별이 어려운 네트워크 세상

영화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한공주. 음악을 좋아하지만 더 이상 노래할 수 없고 친구가 있지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출처: 영화 [한공주]>

2014년 개봉한 독립 영화 [한공주](이수진 감독)는 2004년 일어난 밀양 지역의 고교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했다. 피해 여학생은 고통과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도 ‘한공주’로 바꾸고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 노래를 좋아하는 공주는 전학 간 학교에서 아카펠라 동아리에 들어가 새 친구들과 사귀는 등 새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친구가 공주의 노래 실력이 뛰어난 것을 보고 노래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서 과거의 악몽이 다시 엄습하게 된다. 동영상이 인터넷 공유를 통해서 가해학생들의 부모에게도 알려지게 되고, 공주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가해자 집단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인터넷 이전에는 과거 혹은 기존의 네트워크를 끊고 새로운 인생을 선택하는 길이 다양했고 방법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네트워크와 평판으로부터 단절되어 새로운 관계들로 구성된 달라진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다. 시골 초등학교 졸업은 곧 친구들과의 기약 없는 이별이 되기 싶고 다른 도시로 전학 가는 친구는 연락이 끊기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개인마다 연결 수단을 늘 휴대하고 다니면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서 항상 소식을 점검하고 연락이 가능한 상황이 됐다. 연결은 선택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기본 환경이 되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에서 개인이 과거와 결별하고 살아가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사와 개명, 성형수술과 이민으로는 내가 알던 사람들, 기존의 네트워크로부터 끊어지지 않는다.

디지털 세계의 덫

모든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디지털, 검색하고 공유하는 사람들, 늘 연결된 소통의 도구가 삶의변화를 꾀할 때 덫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잊어버리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과 사건이 인터넷에 남아 있는 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을 길은 사실상 없다. 인터넷은 소통의 도구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할 때는 인터넷의 정보 검색 기능과 스마트폰의 연결성이 결정적 걸림돌이 된다. 영화 속 ‘한공주’의 일만이 아니다.

[레 미제라블]의 전과자 장발장이 과거와 단절하고 마들렌이란 이름과 신분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던 것처럼, 변화하는 존재인 우리에게는 새 출발의 기회가 허용되어야 한다. 과거를 벗어나 ‘새 출발’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인터넷 세상이 지금처럼 가혹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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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권 | 한겨레신문 부설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소장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언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한양대 신방과 겸임교수를 지냈다. 1990년부터 한겨레신문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2014년 설립된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2014), [인터넷에서는 무엇이 뉴스가 되나](2005), [별별차별](2012, 공저)을 저술했으며, [잊혀질 권리](2011)를 번역했다. 사람과디지털연구소를 통해 디지털 시대, 기술의 새로움과 편리함 너머 더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용법을 성찰하고 널리 알리면서 ‘디지털 리터러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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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철학과 구체적인 지침을 ‘디지털 리터러시’ 개념으로 제안한다. 디지털의 속성과 구조를 파악하고 디지털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능력이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필수 교양이 된 것이다. SNS가 주는 박탈감이나 행복감 모두를 성찰하면서 도구로서 현명하게 사용할 방법을 권한다. 사람과 디지털의 건강한 관계 맺기를 위한 지침서!
발행201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