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1932_20171009(디지털여가)

기사

지루함·빈둥거림, 창의성 원천이나 스마트폰에 소멸 위기

2017.10.11
디지털 시대 여가의 의미

효율성·속도 숭상하는
한국 사회 빨리빨리 문화
멍하게 빈둥거림 없어지면서
성찰·창의성 함께 사라질 위기
생활 속 지루함 찾을 길 모색해야

빈둥거리면서 멍하게 딴생각하는 능력은 이제 누가 누가 더 잘하나를 겨루는 대회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레어템’이 됐다.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지난 4월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열흘 연휴가 끝났다. 우리 사회가 일찍이 맛보지 못한 긴 공식휴가였다. 지금은 멕시코에 1위를 내주고 2위이지만 한국은 줄곧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장 노동시간의 국가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 ‘2017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취업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069시간으로, 회원국 평균 1764시간보다 305시간 길었다. 하루 8시간 기준 258일이니, 회원국 평균(220일)보다 38일 더 일한 셈이다. 초중고 학생들 학습시간도 다툼의 여지 없는 세계 최장이다. 한국 사회의 ‘빨리빨리’ 문화에서 기다림과 느림은 제거해야 할 병폐이자 비효율이었다. 2012년 대통령선거 운동 과정에서 등장한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가 주목받은 현상은 저녁 없는 삶이 보편화한 한국 사회를 말해준다. 교과서에 ‘개미와 베짱이’ ‘토끼와 거북의 경주’ 우화를 실어 어려서부터 근면을 강조하고, 여가와 빈둥거림은 죄악이라고 가르쳐왔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사냥하는 게 아니라,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는 말로 속도가 더 강조된다.


우리 사회에서 여가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지 않다. 학교의 재량휴업, 대체공휴일 제도,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 등 여가를 지원하는 행정적 조처도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선회의 배경에는 여가의 경제적 가치가 분석되면서 소비 활성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의 확산이 있다. 여가를 보내는 방법으로 선호되는 여행에서도 제한된 시간에 얼마나 바쁘게 움직여 더 많이 여러 곳을 가보고 활동했는가가 주요 선택기준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은 여가를 보내는 방법으로도 환영받지 못해왔다. 구체적인 지향이나 특정한 의도 없이 빈둥거림은 시간낭비이자 비생산적 시간 소모로 여겨졌다. 지루함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제거 대상이었다.


그런데 최근 지루함과 빈둥거림의 가치에 대한 긍정적인 조명이 잇따르고 있다. 두 가지 차원에서의 접근인데, 모두 디지털 기술의 확산과 관련이 깊다. 스마트폰이라는 매혹적이고 강력한 도구가 만인의 일상을 지배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흐름이다.


하나의 흐름은 누구나 스마트폰을 늘 휴대하고 사용하면서 잠시도 심심하고 지루할 틈이 생겨나지 않는 상황이 됐다는 현실이다. 버스나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도, 친구와의 약속 시간도, 주문 뒤 대기하는 시간도 더 이상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누군가와 소통하거나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간으로 변했다. 대중 교통수단으로 이동할 때나 보행 중에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사회생활을 위해 사용을 강요받는 상황도 늘어난다. 소셜미디어나 스마트폰 앱을 설치하면 무조건 푸시 알림이 초기설정(디폴트세팅)으로 깔린다. 콘텐츠 이용을 선택하지 않아도 쉴새없이 날아드는 각종 알림과 이메일을 처리해야 하느라 분주하다.


미래학자들은 디지털 기술 발달로 미래에는 기다림이라는 개념이 소멸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그보다 먼저 지루함이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데 편리하고 매력적인 도구로 인해 지루하거나 빈둥거릴 틈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걸어가면서 또는 멍하게 앉아서 자신에 대해서 또 타인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할 틈도 함께 없애버리고 있다. 성찰과 연결되는 지루한 시간이 사라지는 상황을 우려하면서 디지털 기기를 잠시 떠나서 빈둥거릴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두번째는 근래 인공지능과 자동화의 영향으로 창의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의 목표가 되면서 지루함이 주목받고 있는 흐름이다. 최근의 잇단 연구 결과와 출판물들은 지루함과 빈둥거림이 무가치한 게 아니라 창의성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을 강조한다. 캐나다 워털루대학 이고르 그로스만 등의 2012년 연구논문은 빈둥거릴 때 창의적 문제해결력이 훨씬 뛰어났다는 결과를 발견했다. 마커스 레이클 워싱턴대학 교수는 인지활동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빈둥거릴 때 비로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인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존재를 밝혀냈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자아성찰, 사회성과 감정, 창의성을 지원하는 뇌의 영역이라는 사실이 첨단 뇌촬영장치(fMRI) 등을 활용한 연구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인공지능 전문가인 인류학자 제너비브 벨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 교수는 “지루함은 창의성과 직결된다. 샤워할 때, 운전할 때, 잡초를 뽑거나 담장을 페인트칠할 때 우리는 기발한 생각을 쉽게 만난다”고 말한다. 디지털 서비스와 상시연결된 삶이 이 시대에 가장 요구되는 창의성을 없애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지루함과 기발함>(Bored and Brilliant)의 저자 마누시 조모로디는 생활 속에 지루함을 불러들여 창의성을 키우는 방법을 조언한다. 그가 2만명과 함께 진행한 지루함을 초청하는 방식은 디지털 기기와 이별하는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이다. 1단계는 먼저 자신의 디지털 습관을 관찰한다. 2단계는 보행할 때나 운전할 때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3단계, 사진을 찍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4단계, 필수불가결하다고 여기는 앱을 삭제한다. 5단계는 소셜미디어나 이메일에 응답하지 않는다. 6단계는 주변에서 무엇 하나를 선택해 깊게 관찰해보는 것이다.


같은 방법은 아니더라도, 지루함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각자만의 방법을 모색할 이유가 점차 커지고 있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