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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머릿속 컴퓨터도 못 다루는데 바깥 컴퓨터가 무슨 소용”

2015.01.27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 디지털 기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발도르프학교 그린우드에서 지난 12일 르네상스 역사 수업이 한창이다. 토론형 수업을 통해 아이들은 사진의 노트처럼 자신이 직접 손으로 쓰고 그린 보고서를 만들게 된다.

[사람과 디지털] 컴퓨터 없는 실리콘밸리 학교

“중학생 애나는 친구 섀넌에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하나 있었죠. 최근 사귄 남자친구와 너무 자랑하듯 애정 표현을 하는 거예요. 애나는 둘이 입 맞추는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죠. 그런데 애나의 친구인 켈리의 엄마가 우연히 딸이 페이스북 하는 모습을 보다가 이 사진을 본 거예요. 켈리 엄마는 섀넌 엄마와 친해요. 그는 즉시 섀넌 엄마에게 ‘딸이 키스하는 사진이 인터넷에 있다’고 알려주었고 비밀연애 중이던 섀넌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어요. 자, 애나가 한 행동은 어디에 해당할까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북부의 작은 마을 밀밸리에 위치한 그린우드 학교에서 지난 14일 열린 초청강연 상황이다. 7학년 교사 샐리가 무대에 나온 4명의 학부모에게 이렇게 물었다. 미국의 7학년은 한국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한다. 주어진 문제는 간단하다. 교사가 말한 상황을 듣고 학생들의 행위가 의도적인지 아닌지, 도움이 되는지 상처가 되는지 두가지 기준으로 나뉘는 네가지 경우로 구분하는 것이다. 예컨대 ‘의도적인 상처’나 ‘의도하지 않은 도움’ 등 어디에 해당하는지 맞히는 거다.
디지털기기 사용 엄격 통제
삶에 필요한 기본교양 위주
학부모 다수가 구글 부사장 등
실리콘밸리 컴퓨터 전문가
비싼 수업료, 백인 위주 한계도
“‘의도하지 않은 상처’죠. 섀넌의 행동들이 있었고 자신은 그것을 찍어서 자기 온라인 사이트에 올려두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섀넌은 엄마에게 혼나게 되었으니 상처죠.”(학부모 대니얼) “‘의도된 도움’이라고 생각해요. 애나는 자신의 행동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았을 거예요. 하지만 이것은 결국 도움이 되었는데 섀넌이 엄마와 솔직하게 이야기 나눌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죠.”(학부모 코트니)
답이 없는 문제다. 이것이 핵심이다. 교사 샐리는 “상당히 어렵죠? 이런 상황이 우리 아이들이 겪는 문제입니다. 고도의 윤리적 판단력이 필요해요. 자녀의 스마트폰 사용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죠”라고 말했다. 그린우드 학교가 ‘기술에 대한 사려 깊은 접근’이라는 제목으로 외부 강사를 불러 진행한 특별강연에, 평일 저녁인데도 50여명의 학부모와 인근 학교 교사들이 모여 학교 소강당은 붐볐다. 그린우드는 이 방면으로 주변에 널리 알려진 학교다.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해당하는 전체 교육과정에서 졸업 직전을 제외하면 디지털 기기 사용을 일절 금지하고 있다. 그린우드 학교가 주목받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학부모 절반이 실리콘밸리 정보기술업계의 임직원이라는 점이다. 애플·구글 등 세계 디지털 혁명을 주도하는 실리콘밸리 컴퓨터 기술자들이 자녀를 컴퓨터 없는 학교에 보내고 있는 것이다.
12일 오전엔 이 학교의 수업을 참관했다. 유치원 과정의 아이 12명이 여러 조형물들이 어지럽게 놓인 방에서 활발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학교 입학처장 베치 앤더슨이 속삭였다. “어떤 조기교육도 강요하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자기 안의 힘을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아이와 서로 대화하고 놀이의 규칙을 만들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죠.” 한편에서는 한 여자아이가 교사와 빨래판으로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가르침은 삶에 필요한 기본 교양들로 제한되었다.
이 학교는 ‘발도르프 교육’에 기초를 두고 있다. 1919년 독일에서 시작된 발도르프 교육은 기존 가치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전통적인 학교교육에 반기를 들고, 아이들 스스로 전인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사와의 교감, 자연·예술·학문의 조화로운 학습 등을 중시하는 대안교육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작은 마을 밀밸리의 ‘그린우드’ 학교 전경.

이 학교는 왜 디지털 기기를 멀리하는 것일까. 교장 아치 더글러스는 “자신에게 주목할 수 있는 교육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요약했다. “어린 시절 휴대용 컴퓨터의 사용이 두뇌와 신경 발달에 얼마나 해로운지에 대한 연구가 많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 학교가 아이들이 자신의 인격과 대인관계에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톡 두드리며 “내 안의 컴퓨터도 다룰 줄 모르는데 밖의 컴퓨터를 줘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

학부모 앤디 글라커(40)는 그린우드를 택한 이유로 “모두가 기술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고민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실리콘밸리 벤처의 기술자다. 글라커는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 힘이 핵심이고, 그건 기계가 키워줄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학부모 크리스 브루어는 “창조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편과 나는 디지털 기기 없는 이 학교의 방침이 아이들 안의 예술성을 키워줄 수 있다고 봤다.” 그의 남편 에릭 브루어는 무선 네트워크 분야 전문가로 현재 구글 부사장이다.
학교는 이런 바탕을 다진 뒤 중학교 1~3학년에 이르러야 ‘디지털 리터러시(디지털 기기를 이해하고 다루는 법)와 시민성’ 과목을 진행한다. 교과에서 아이들은 먼저 컴퓨터를 분해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을 배운다.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같은 디지털 공간에 남기는 흔적이 자신의 미래와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도 학습하게 된다. 디지털 수업을 듣기 시작한 이 학교 중1년생 이사벨은 “사람들은 인스타그램(SNS의 일종)에 얼마나 사진을 많이 올리는지, 인터넷 세상에 얼마나 자주 있는지로 인기를 판단하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는 않는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교육 성과를 대학 진학률만으로 가늠할 순 없지만, 엿볼 수는 있다. 북미발도르프협회가 내놓은 연차보고서를 보면 2013년 발도르프식 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은 94%로, 전체 평균(65%)에 비해 월등히 높다. 실리콘밸리의 발도르프 교육은 2011년 <뉴욕 타임스>의 보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린우드 학교 학생은 당시 127명에서 현재 135명으로 소폭 상승했다.
그린우드식 교육에도 한계는 있다. 교사당 학생 수가 6.6명으로 학비가 1년에 2만달러(약 2000만원)이고, 학생의 90% 이상이 영미계 백인이다. 하지만 더 빨리 컴퓨터 기술을 접할수록 당연히 디지털 시대에 앞서는 양 여겨지는 추세에 던지는 의미는 작지 않다. 지난해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스마트폰 소지율은 60%에 육박했다.
캘리포니아/글·사진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